글 문희철 프로 캠페인 5팀 ridian.moon@samsung.com
2015년은 삼성전자 IT를 담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도전과 응전의 한 해였다. 한정된 예산으로 PC, 모니터, 프린터 등 다양한 IT 제품 라인업을 커버해야 했고, TV광고 영상 제작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낵컬처 콘텐츠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콘텐츠 자체의 매력은 차치하고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연초부터 새로운 스낵컬처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쏟아왔다.
2015년 삼성전자 IT 스낵컬처 콘텐츠
• S아카데미: 삼성전자 최초의 카카오톡 콜라보레이션으로 4000만번 이상 활용된 브랜드 액션 이모티콘
• B2C 프린터: 정품 토너의 4가지 USP를 참여형 웹툰 스토리로 풀어낸 퀴즈 웹툰북
• PC: 실사 컷과 애니메이션을 절묘하게 조합한 노트북9의 9컷 소셜 포토툰, 일러스트 오브제마다 애니메이션 무빙을 적용한 노트북9의 모션스토리북
이는 삼성전자에서 처음 시도해본 스낵컬처 콘텐츠의 사례로 TV광고가 아닌 진정한 빅 아이디어 중심의 BTL 캠페인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영상이 빠진 스낵컬처 콘텐츠로는 브랜드의 스토리와 메시지를 담는 데 한계가 있었고, 콘텐츠 확산을 통해 추가적인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영상이 필요했다.
레벨U 론칭, 기존과 다른 접근법
때마침 무선 헤드셋인 레벨U의 론칭 캠페인을 맡게 됐는데, 매우 트렌디한 제품인 만큼 바이럴 영상을 제안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신제품 론칭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예산. 제대로 된 고퀄리티의 영상 한 편을 만들고 나면 조기 확산을 유도할 페이드 미디어(Paid Media) 집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더욱이 평범한 영상으로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생겼다.
또 하나의 고려 요소는 타깃. 레벨U의 타깃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 영화 등의 콘텐츠를 자유롭게 즐기는 2030 직장인과 학생이다. 조사에 의하면 이들은 블루투스 이어폰과 헤드셋을 주로 이동 및 활동 중 음악 청취를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삼성전자 소비자 조사 2014.12).
그렇다면 이러한 젊고 트렌디한 모바일 세대에게 기존의 도식화된 광고 문법이 통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레벨U의 타깃을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했다.
클리셰로 클리셰 극복하기
우리도 처음에는 ‘정공법(正功法)’이 정답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놉시스로 ‘잘 기획된’ 광고 한 편을 만들려고 했다.
• 운동하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빠지는 이어폰
• 지옥철, 게이트에 걸리고 앞 사람 가방에 걸리는 이어폰
• 주머니에서 꺼내거나 가방을 열 때마다 줄이 꼬여 있는 이어폰
빠지고, 걸리고, 꼬이고…. 유선 이어폰을 쓰면서 불편했던 여러 공감 에피소드를 한데 엮어 스타일리시하게 편집한 ‘잘 기획된 정답 같은’ 영상. 그러나 이런 광고는 클라이언트에게는 만족감을 줄지언정 결코 센세이션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타깃이 전혀 열광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진부하고 전형적인 광고는 모바일 세대에게 클리셰에 불과하다. 클리셰란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게 느껴지는 스토리나 표현을 말하는데, 이러한 클리셰는 극복의 대상이다. 다만 클리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있을 법한 이야기, 누구나 예상하는 뻔한 결말과 캐릭터 설정…. 그럼에도 이러한 스토리와 표현법은 모든 이들이 잘 알기에 빠르게 전달되고 여러 모로 효과가 크다.
그렇지만 클리셰의 의미 없는 나열은 어떠한 주제의식도 담지 못하고 ‘막장 드라마’로 전락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클리셰를 기반으로 클리셰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스낵컬처 콘텐츠의 선두주자, 72초 TV와의 콜라보레이션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가 영상을 직접 만들어야 된다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광고 문법이 필요하다면, 직접 만들지 않고도 우리가 원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들과 힘을 합치면 된다.
현재 20대의 모바일 이용 시간은 하루 평균 3시간 44분. 콘텐츠 형식별로는 동영상 서비스(25.4%)가 텍스트(29.6%)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접하는 콘텐츠라고 한다. 하지만 모바일에서 영상 콘텐츠를 끝까지 보는 비율은 46%에 그치고, 20대가 생각하는 영상 콘텐츠의 적절한 길이는 불과 43.1초이다(경향신문 2015.9.3).
한마디로 타깃들은 지루할 틈이 없는 짧은 영상 콘텐츠를 선호한다. 그렇다면 실제 이런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제작사를 찾아 콜라보레이션을 하면 어떨까?
하지만 대부분의 모바일 콘텐츠가 소비자의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즉, 모바일 플랫폼에서는 모바일 환경에 특화된 콘텐츠가 개발돼야만 하는데, 능력 있고 검증된 제작사의 부재로 퀄리티 면에서는 아직까지 웹 콘텐츠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반면 우리가 찾은 ‘칠십이초’라는 제작사는 여타 프로덕션이나 부티크와는 완전히 다른 제작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감독, 배우, 작가, PD, 촬영기사 등 모든 제작 프로세스를 내부 시스템 안에서 해결할 수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브랜드에만 집중하고 콘셉트의 통일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2030 모바일 세대에게도 통할 만한 영상이 나올 거라 확신했다. 사실 이들은 일상 속 공감 스토리를 72초 분량의 초압축 드라마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대표적인 스낵컬처 콘텐츠의 선두주자이다.
72초 드라마는 매력도 측면에서 타깃의 모바일 스낵컬처 문화에 부합하는 공감 스토리 및 독특한 편집으로 이미 견고한 팬덤이 형성돼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제품 인지도 및 호감도의 상승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는 독특한 서사 구조
자,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클리셰로 클리셰를 극복할 것인가? 칠십이초와 우리는 클리셰 자체가 아니라 클리셰들을 하나로 엮고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례로 주성치의 최고 흥행작인 <쿵푸 허슬>을 보면 무수한 클리셰가 난무한다.
무자비한 조폭 도끼파와 순박한 천민촌 돼지파로 이분화된 선악 구조, 절대 무공을 가진 은자들의 출현을 비롯해 맨몸 결투와 죽음, 주인공의 각성과 권선징악적 결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등 상투적인 문구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의미 없는 클리셰가 무한 반복,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클리셰가 물질 만능주의, 폭력 지상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서사 장치 아래 수렴된다. 즉, 의도적으로 클리셰를 곳곳에 배치해 사회의 불합리성을 비꼬고 풍자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레벨U의 콜라보레이션 영상에서도 상투적으로 느껴질 만한 클리셰가 많이 노출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여자 친구와 여행 가려는데 통장 잔고가 0원인 상황, 자유로운 액션을 요구하는 주문에 따라 갑자기 춤을 추는 장면, 풍부한 음질을 표현해 달라고 요구받을 때 나오는 눈부신 카메라 360° 패닝(Panning) 장면, 클라이언트가 만족하면서 웃을 때 등 뒤로 서광이 비추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점은 이런 클리셰들이 어떠한 서사적 구조에 따라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 레벨U 콜라보레이션 영상은 돈이 떨어진 주인공이 협찬사로부터 레벨U를 협찬받고 광고를 찍으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이다.
즉, 기존 광고처럼 멋진 ‘훈남’과 ‘훈녀’가 등장해서 제품을 ‘고급스럽게, 은연중에 노출’하는게 아니라, ‘찌질한’ 30대 남성이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해 협찬을 받고서 ‘최선을 다해 대놓고 광고’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특히 협찬사의 노골적인 요구와 그런 요구를 감내해야 하는 에이전시의 입장은 기존 광고가 보여줄 수 없었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금기시된 서사적 구조이다.
주인공이 협찬사의 노골적인 요구를 열심히 수행하면 할수록 광고는 점점 우스꽝스럽게 변하고, 주인공은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어설픈 춤을 춰야만 하는 아이러니. 물론 과장됐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이 스토리에 감정이입돼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공감을 얻게 된다.
한편 영상 내 등장하는 가상의 협찬사는 철저히 희화화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영상 밖에 존재하는 실제 협찬사는 이런 도발적인 영상을 내보임으로써 자신들은 사실 비상식적이고 뻔뻔한 회사가 아니라, 오히려 매우 융통성 있고 용기 있는 회사라는 점을 어필하게 되는 것이다.
‘대놓고 광고하기’의 역설적 효과
이러한 서사 구조의 역설적 효과는 최근 네이티브 광고의 흐름을 잘 이해한 데 있다. 지난 6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조사에 의하면 “기사라고 읽었는데 광고일 경우 속았다는 기분이 들 것 같다”는 답변이 77%로 높게 나타난 반면, “기업의 협찬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밝히면 네이티브 광고는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 68.5%로 나타나 협찬 여부를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기사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블로터 2015.8.31). 놀랍게도 ‘대놓고 광고하기’라는, 기존에 보지 못한 독특한 서사 장치가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신뢰까지도 높여줄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 레벨U와 칠십이초가 제작한 콜라보레이션 영상은 시장에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페이드 미디어를 거의 WLQ행하지 않고도, 10월 5일 기준 약 371만 뷰와 1만 7400건 이상의 ‘좋아요’를 달성했다. 이 수치는 계속 상승 중이다.
이러한 정량적 수치 못지않게 직접적인 소비자 반응도 폭발적이다. 주로 내용 자체의 기발함과 ‘드라마+광고’ 라는 새로운 콘텐츠 형식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대부분이며, “재미있다, 중독된다, 잘 만들었다, 사고 싶다, 센스 있다, 추천하고 싶다” 등의 댓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특히 한 번 보고 돌아서면 또 보고 싶어져 이 영상을 ‘마약 광고’라고 지칭한 댓글도 있었다.
네이티브 광고의 새로운 방향성 제시
요컨대 이번 콜라보레이션 영상은 기존의 단순한 PPL 방식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브랜드를 중심에 두고 제작한 초압축 드라마이며, 기업 마케팅을 위한 새로운 광고 플랫폼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영상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72초 TV가 진화된 스낵컬처 콘텐츠의 형태로 기업과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인 최초의 사례라는 점과 더불어 ‘대놓고 광고하기’라는 솔직하고 신선한 접근으로 클리셰를 극복하고, 나아가 네이티브 광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레벨U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이 더 활발해지려면 광고인들의 촉이 더 많은 곳에, 더 빨리 뻗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책임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