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창작,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제일기획 매거진 기사입력 2022.03.15 05:04 조회 2501
 우리는 대중예술의 파급력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해진 시대를 산다. 서울의 유튜버가 올린 동영상을 리우데자네이루의 구독자가 실시간으로 보고, 에든버러의 작곡가가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린 트랙을 타이페이의 래퍼가 다운로드해 그 위에 랩을 얹는 시대. 일단 공개하고 나면, 콘텐츠의 전파 속도와 범위는 더 이상 창작자가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큰 힘에는 언제나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어느 때보다 큰 파급력을 손에 쥔 만큼, 우리는 더 신중한 태도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우리끼리 보는 작품’이라는 핑계로 무리 집단에서만 통용되는 농담 코드를 활용한 부족 주의적 태도를 취해서도, ‘그래 봐야 동영상 한 편, 웹툰 한 컷’에 불과하다는 태도로 대중예술의 영향력을 부정해서도 안 되는 시대, 콘텐츠 창작자들이 유념해야 할 윤리는 무엇일지 함께 고민해 보자.


다양성을 포용한 <호크아이>
 

 
 

2020년 MCU 드라마 <호크아이> 제작진은 오디션 공고로 ‘미대륙 토착민, 청각장애인, 20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를 찾았다. 1999년 <데어데블> 코믹스에 처음 등장한, 미대륙 토착민이자 청각장애인이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을 지닌 캐릭터 ‘마야 로페즈’를 데뷔시키기 위해서였다. 오디션장을 찾은 알라콰 콕스는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메노미니 부족과 모히칸 부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미대륙 토착민에 20대 여성이며, 날 때부터 청각장애인이었다. 연기 경력은 전무했지만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선 굵은 외모는 마야를 연기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원작의 마야와 달리 알라콰 콕스는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한 절단 장애인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의족은 의상으로 가리거나 굳이 크게 부각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호크아이> 제작진은 배우가 가진 조건에 맞춰 마야 또한 의족을 착용한 절단 장애인으로 설정하고는, 마야가 날아드는 칼날을 의족으로 받아내는 액션 시퀀스를 설계해 작품에 녹여냈다. 소수자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나아가 그를 캐릭터의 주된 능력 중 하나로 부각한 것이다. 덕분에 마야는 미대륙 토착민과 청각장애인은 물론, 절단 장애인들까지 자신을 투영하고 환호하는 히어로로 거듭났다.

흔히 대중예술은 더 많은 이에게 어필하기 위해 인구 구성상 수적 다수를 점유한 이들을 재현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주로 반영한다. 잘못이라 할 수는 없으나, 같은 선택이 문제의식 없이 반복되다 보면 자칫 동시대를 엄연히 살아가는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갈수록 다원화되는 사회에서, 부당하게 배제되는 사람을 줄이고 더 많은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을 작품에 반영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기다.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준 재현의 윤리
 

 

성폭력 피해자를 다루는 작품 중에는,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당했는지 고발해야 한다는 이유로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사례들이 종종 있었다. 그 끔찍한 폭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고는 피해자의 고통을 합당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창작자들의 변이다. 하지만 자칫 폭력 자체를 자극적인 볼거리로, 일종의 스펙터클로 전시함으로써 관객의 감상 방향을 오도하기도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이옥분(나문희)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며 생기는 일들을 담아낸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 지점을 현명하게 돌파해냈다. 일본군 주둔지에서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당한 폭력과 학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되, 그들이 당한 결정적인 폭력은 화면에 재현하지 않는 방법을 택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것이다.

화면에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는 언제나 창작자들을 고민케 하는 주제다. 특히나 공익적 목적을 위해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소수자를 재현해야 하는 상황이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재현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전략이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다. ‘아프리카 기아 돕기’나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 등에서 자주 쓰인 이 전략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존엄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일이 자칫 재현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향한 폭력이 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안전한 창작 환경 <걷기왕>, <오목소녀>


 

2016년 개봉한 영화 <걷기왕>은 내용만큼이나 다른 이슈로도 화제가 된 작품이었다. 안전한 창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앞서 전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원래 성희롱 예방 교육은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걷기왕> 이전까지는 현장 프로듀서를 비롯한 주요 스태프 몇 명이 교육을 듣는 수준에 그쳤다. <걷기왕>은 한국 영화 제작 현장 사상 최초로 제작진 전체에 교육을 공지하고 적용한 현장으로 기록됐다.

백승화 감독의 의지와 연출부로 일했던 남순아 감독의 건의로 이루어진 이 노력은, 감독의 차기작 <오목소녀>(2018)로도 이어졌다. 단순히 ‘성희롱은 나쁘니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성희롱의 원인이 되는 강압적인 문화와 위계적인 분위기를 영화 현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모든 스태프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한 <오목소녀> 현장은 지금까지도 모범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예술가를 ‘자유로운 영혼’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들의 기행이나 괴팍한 성격, 독단적인 의사결정 등을 너그러이 봐주는 풍토를 낳았다. 이런 낭만주의적 시선은, 예술 창작에 임하는 수많은 스태프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용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윤리적 소비와 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시대에, 안전한 창작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창작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 사이
 
예술이 도덕주의의 굴레에 갇히면 안 된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예술은 다양한 가치를 표현하고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옳은 가치를 담아낸 작품만이 가치가 있다’는 식의 주장은 자칫 예술의 소재와 형식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제약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조의 오류를 반복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이 당대의 정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특히나 대중예술은, 동시대의 사건과 시대적 공기에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장르로서의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다. ‘창작자’로서의 자유를 보호받는 동시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자신의 창작물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콘텐츠 창작자로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그 끊임없는 균형 사이에 있다.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진 <채널 꺄뜨르> 편집장, <텐아시아> 취재기자를 거쳐 현재까지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한겨레> 토요판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엔터미디어> ‘TV삼분지계’, <고교 독서평설> ‘잘 봐 놓고 딴소리’ 등을 연재 중이며, MBC 옴부즈맨 프로그램 <탐나는 TV> 패널로도 출연 중이다. 저서로는 <예능, 유혹의 기술>,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잘 봐 놓고 딴소리> 등이 있다. 모처럼 일이 없는 날에는 대체로 드러누워 있는 고양이들을 뒤집으면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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