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 나중을 믿지마라!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말이다. 감각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말은 아니다. 말의 주인은 호라티우스(Horatius, 기원전 65년-8년)이다. 그의 노래다.
묻지 마라, 아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어떤 종말을 나에게, 어떤 종말을 너에게 시들이 주었는지. 레오코노에여, 바빌론 별점에 의지 말라. 어떤 일이 닥치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유피테르가 더 많은 겨울을 허용했든, 구멍 뚫린 바위들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서해를 연약하게 만들고 있는 올 겨울만 허용했든, 생각 줄을 놓지 마라. 포도주를 걸러라. 짧은 간격으로 긴 희망을 잘라라.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시샘 많은 세월은 저만치 가고 있다. 오늘을 잡아라. 나중이란 말은 될 수 있으면 믿지 마라.
<송가> 11
'노세! 노세! 젊어 노세!'의 로마 버전인 셈이다. 하지만 되는 일이 없어 허무한 세상, 술이나 마시면서 지내자는 패배주의 내지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노래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결론부터 말하면, 당장 '오늘을 잡아라'는 말은 '하루를 귀하게 여겨라'를 뜻하는 표현이다. 보충이 필요하겠다. 원문은 'carpe diem'이다. 'carpe'는 carpepre의 명령형이다. 농업용어다. 꽃이나 이삭이나 열매를 따는 뜻을 지닌 동사다. 이를 살려 carpe diem을 풀이하면 꽃송이 따듯이 '하루를 따라'는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적어도 향락주의는 아니다. 물론 '포도주를 걸러라'는 당부가 눈에 걸린다. 하지만 '생각 줄을 놓지 마라'라는 조언이 바로 이 표현을 받는다. '포도주를 걸러라'는 당부는, 어렵고 괴로우며 외롭고 지치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는 것이다.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런데 견딤을 견딤으로 알고 견디는 것은 쉽지 않다. 견딤 자체를 즐길 때에는 견딤은 더이상 견딤이 아니라 즐김이 된다. 그런데 견딤이 즐김으로 승화되는 것들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 호라티우스에 따르면, 그것들 가운데의 하나가 희망이다. 희망이 생각 줄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한 순간도 즐길 수가 없다. '생각줄을 놓지 마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원문은 sapias이다. 이 말은 '지혜롭다' 혹은 '현명하다'를 뜻하는 sapere 동사의 2인칭 단수 접속법 형태이다. 마음의 주인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과 투쟁에서 생각이 희망에게 밀리지 말라는 뜻을 살리기 위해서 '생각 줄을 놓지 마라'고 옮겼다. 희망이 생각의 벼리를 쥐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라는 지침을 담고 있는 노래이기에. 나중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불과한 희망에 생각 줄을 내주면, 결국은 즐김은 마음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희망을 마음의 무대에 끊임없이 쏟아 올리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희망의 배후 조종자가 불안과 공포인 셈이다. 불안과 공포가 마음의 바탕을 장악하고 있는 한, 견딤만 있지 즐김은 없다. 마음의 주인 자리를 희망에게 주지 말라는 것이다. 생각 줄을 붙잡는 것이 힘에 겨울 때에는 포도주의 힘을 잠시 빌리는 정도는 괜찮다는 소리다. 즐기는 것이 결코 쉽지은 않다는 것이다. 즐기는 법이 몸에 제대로 배어있어야 하기에.
용기를 내어 생각 줄을 잡아라!
그렇다면 즐기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호라티우스의 말이다.
시작이 반이다. 용기를 내어 생각 줄을 잡아라, 시작하라!
<서간> 제 1권 2편, 40-41절
'시작이 반'이라는 말 덕분에 유명세를 탄 명언이다. 하지만 즐기는 법을 터득하기 위한 비결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생각의 줄을 잡아야 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앞에 소개한 호라티우스의 노래가 단순하게 '노세!노세!'따위의 잡가가 아님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잘 놀기 위해서 요청되는 덕목이 용기이기 때문이다. 목숨을 내걸고 싸움터에 나서게 하는 힘이 용기이다. 그런데 잘 놀기 위해서도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도대체 이는 어떻게 해명이 될까? 사연인 즉 이렇다. 호라티우스가 '용기를 내어 생각 줄을 잡아라'는 말을 한 것은 친구와 독자들에게 '철학'을 권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철학'은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가리킨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생각 줄을 잡아라(sapere)'는 지침이다. 말이 나온 김에, 생각 줄 잡는 법에 대해 보충하겠다. 한 마디로 '생각 줄 잡기'는 번잡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내면을 통찰하고 자기 완성으로 나아가는 수련이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의 지식인 세계에서 유행했던 삶의 방식이다.
특히 에피쿠로스 철학을 신봉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랬다. 은둔 자적의 현자(sapiens)인 자족(satis)의 존재가 되는 것이 그들의 로망이었는데,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은 바로 이 로망의 염원이 담긴 말이었다. 하지만 자족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세속의 잡다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과의 은밀한 감응을 통해 우주와의 소통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족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한시도 '생각 줄'을 놓아서는 안되기에. '생각 줄'을 놓지 않는 사람을 현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자가 되기로 마음먹는 것 자체가 더 큰 도전이다. 세속을 버려야 하기에. 이것이 호라티우스가 '용기'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가 세속의 권력까지 장악하고 나서부터다. 자연과 우주와의 소통은 이제 특정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제 집단의 고유 권한으로 축소되어 버렸기에, 단적으로 계시의 은총이 아닌, 자연-본성에 의한 통찰과 깨달음은 종종 이단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라티우스가 강권했던 철학으로의 길은 원래도 통행이 뜸한 곳이었지만, 더 황량한 곳이 되고 말았다. 현자가 되려는 시도는 심지어 마녀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견딤에서 즐김으로!
하지만 시간은 흐른다. 물론 1700여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호라티우스가 호소했던 철학으로 가는 길을 걷게끔 하는 자유를 허하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다시 제기된다. 대표적인 이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다. 흥미롭게도 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의 첫 문단에서 호라티우스의 '용기를 내어 생각 줄을 잡아라(sapere aude)'를 인용한다. 도대체 어떤 역사적인 맥락에서 던진 말일까? 이 말은 칸트 자신에게 한 말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오랜 세월 세속의 권력을 향유했던 성직자들과 계몽 사상가들이 세속의 교육 문제를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던 시기이다. 신의 은총이 아닌, 자연-본성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이가 칸트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힘은 어쩌면 지혜가 아닌 용기였을 것이다. 지혜의 경우야 요컨대, 자연-본성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던 이가 칸트가 처음은 아니었고, 이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 라이프니츠, 볼프와 같은 선배들이 이미 닦아 놓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칸트는 용기 있는 철학자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선배와 동료 학자의 지지를 받았고, 서양 고대 사상가들, 예컨대 이교도 사상가인 키케로나 루크렝티우스의 <자연의 본성에 대하여>에서 나름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정리하자. '생각 줄 잡기'도 철학의 한 축이었다. 견딤을 견딤으로 견디게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견딤을 즐김으로 끌어 올려주는 길으 일러주기 위해서였다. 예컨대 만족에서 자족으로 가기 위해 잡아야 할 것은 멀리 있는 희망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