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EDITION
아주 오래된 시집들
윤동주, 백석, 김소월, 김영랑…, 최근 출판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시인들의 목록이다. 시‘ ’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도 희귀한 일이지만 더욱 특이한 것은 가독성이 떨어지는 세로쓰기나 빛바랜 느낌의 표지, 과거의 맞춤법까지, 초판본 오리지널 디자인을 살린 ‘복각본’이라는 점이다. 일부는 현재의 시집 열풍이 ‘읽기용’이 아닌 팬시한 디자인에 초점을 맞춘 ‘소장용’임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 자체의 아름다움이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먼 우주의 별이 지구의 밤하늘에서 반짝이듯이, 오랜 시간을 건너 현재에 살아난 그들의 시 역시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하나둘 아로새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6년 초판본 <사슴>_백석
1936년 세상의 빛을 본 백석의 <사슴>은 그 시대의 문인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어했던 시집이다. 당시에도 한지에 인쇄한 뒤 종이를 자르지 않고 반으로 접는 전통 자루매기 제본 방식으로 오직 100부만 발행했기에 보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인 윤동주도 필사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사슴>은 영화 <동주>에도 등장한다. 사실 평안도 사투리와 고어를 많이 사용하는 백석의 시는 요즘 독자가 읽기에 마냥 쉽지만은 않다.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게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그러나 구수한 평안도 사투리로 고향의 정서를 노래하는 백석의 시를 읽노라면 어린 시절 마음 포근했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시가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 중 하나다.
1925년 초판본 <진달래꽃>_김소월
‘가시리’, ‘아리랑’, ‘진달래꽃’까지 가장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노래한 김소월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시집 <진달래꽃> 역시 1925년에 첫 발행된 이래 꾸준히 출간돼왔다. 그러나 최근 <진달래꽃 1925년 초판본>의 디자인을 살린 김소월 시집은 독자들에게 세월의 간극을 건너 1925년의 김소월과 연결된 듯한 감동을 주었다는 점에서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초판본 구매자들에게 책을 넣은 누런 봉투에 경성우편국 1925년 12월 26일자 소인을 찍고 김소월의 본명인 ‘김정식’으로 책을 발송하는 이벤트를 진행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뻔한 상술임을 알지라도 독자들이 즐거이 지갑을 연 것은 암울한 시대에도 뜨겁게 문학을 꽃피웠던 그때 소월의 마음에 응답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1935년 초판본 <영랑시집>_김영랑
‘북에 소월, 남에 영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영랑은 김소월 이후 우리말을 다루는 언어 감각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다. 한자나 외래어 대신 고유의 우리말을 섬세하게 갈고 닦아 엮어낸 김영랑의 시는 지금 보아도 아름다운 울림을 전달한다. 이번에 출시된 <영랑시집>은 1935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초판본의 내용과 활자를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당시 ‘서정시의 극치’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영롱한 언어로 빚어낸 아름답고 순수한 김영랑의 시 세계에 흠뻑 젖어 있다 보면 망설임 없이 봄에 가장 어울리는 시집으로 추천하고 싶어진다.
1955년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_윤동주
시집 열풍 속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다. 이 시집은 윤동주 서거 10주년을 맞아 1955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증보판을 되살린 것으로 영화 <동주>의 개봉에 힘입어 젊은 층까지 아우르며 인기몰이 중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랬던 청년 윤동주.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도 ‘서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빼어나고 결 고운 서정성이 담긴 작품을 남겼으나 결국 독립운동 및 한글 창작 혐의로 체포돼 1945년,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모두가 자신의 힘듦을 말하는 시대, 윤동주의 시가 그의 인생과 맞물려 더욱 가슴 뜨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Bear picks(곰의 선택)에서는 자발적으로 천천히 또는 느리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택할 만한 주제들을 다뤄봅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중-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