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촉(觸)] 동네 1등이 전국 1등
글 이향은 성신여대 산업디자인학과 연구교수 xmozil@hanmail.net
골목길이 달라지고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작은 골목길에서 다양하고 소소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마음속의 놀이터이자 휴식처였던 골목길이 이제 지친 도시인을 끌어안으며 새로운 도시 감성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스토리두잉과 노스탤지어
골목길이 허름하고 어두컴컴한 이미지를 벗고 젊고 모험적인 ‘미니 자본’의 새로운 실험실이자, 감성 풍부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개성이 다채롭게 구현되는 캔버스가 되고 있다. 생동하는 문화의 옷을 입은 작은 가게, 그라피티의 세례를 입은 담벼락, 허를 찌르는 네이밍과 디자인의 간판을 단 대문은 거주자는 물론 우연한 방문객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차로 이동하기 어려운 좁은 골목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면서 골목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선사하는 선물 같은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골목길은 유독 ‘추억’이라는 감성적인 단어와 잘 어울린다. 큰 흥행으로 연일 화제가 된 영화 <국제시장>도 골목에서 영감을 찾았다. 영화의 연출을 맡은 윤제균 감독이 “골목길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듯 현 시대에서 골목은 노스탤지어의 메타포로 통한다. 숨이 막힐 듯 빽빽한 빌딩과 고층 아파트에 적응된 현대인에게 사람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않는 소박한 골목길은 ‘휴먼 스케일’을 통해 신선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실제로 보행자의 눈높이에 맞춰 골목길을 재정비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걸을 때 눈높이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것들에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방식은 골목은 물론 더 나아가 도시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골목길이 뿜어내는 매력
골목의 장점은 저렴한 임대료 덕에 고정 비용을 낮출 수 있어, 대로변이나 상가에 비해 매출은 작지만 수익률이 높다는 데 있다. 비교적 적은 투자 비용으로 업주가 추구하는 과감한 실험과 다채로운 개성을 표현하고 이는 곧바로 새로운 것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소구점이 된다. 서로가 ‘윈-윈(Win-Win)’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 특히 SNS 세대들은 가볼 만한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발품 팔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외려 숨겨진 새로운 곳을 찾아 소개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트렌드세터’로 여겨진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만 존재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찾아가는 사람들 덕에 골목길이 감성과 창의성의 원천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비싸고 좋은 자리는 넘치지만 싸고 좋은 자리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최근에는 좁고 구불구불하거나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소위 ‘상권’으로 불리기 어려운 입지임에도 사람들이 몰리는 기현상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요즘 소위 뜨는 골목에 가면 훌륭한 서양식 정찬부터 커피는 물론 유명한 디저트에 쇼핑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복잡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골목 한 곳에서 다채로운
먹거리와 볼거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점은 젊은 사람들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저항감 없이 찾게 만드는 이유다. 바야흐로 골목은 상권의 입지와는 무관하게 엄청난 매출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카페 창업 역시 프랜차이즈를 좇던 분위기에서 소규모 카페로 전환되고 있는 모양새다. 좁은 골목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구조와 인테리어,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대기업 프랜차이즈에서는 볼 수 없는 감성을 주기 때문이다.
골목길 부활의 배경, LBS와 SNS
버스나 지하철은 물론 차를 세울 곳도 마땅치 않아 자가용 이용이 어려운 곳임에도 골목 상권이 주목받는 주된 원인은 LBS(Location Based Serviced, 위치기반 서비스) 기술의 혜택과 SNS 세대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쉽게 싫증을 느끼는 젊은 세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새롭게 업로드할 콘텐츠에 목마른 SNS족들은 숨어있는 골목까지 직접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스마트 폰만 있으면
문 앞에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한 LBS 기술 덕에 찾아가는 과정 또한 번거롭기보다는 마치 게임처럼 느껴진다. 각각의 개성이 넘치는 ‘맛과 멋’으로 무장한 가게들이 좁은 골목길 촘촘히 줄지어 있어 SNS 세대들의 입과 눈을 사로잡고, 방문객들은 인증샷으로 피드백한다. 실제로 SNS상의 골목길 관련 버즈 61만 건을 분석한 결과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약 9.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채널별로 그 분포가 다양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전까지는 SNS의 비중이 높았다면 최근에는 SNS보다 블로그와 인터넷 카페의 버즈양이 4배 이상 늘었다. 이는 골목길에 대한 관심 그룹이 개인에서 점차 집단 및 다수로 넘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십 수 년 전부터 알토란처럼 운영되던 고로케집이 유명 블로거나 인스타그램 유저에 의해 소개되면 그 고로케집은 지난 10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유명해진다. 돈 주고도 하기 힘든 생생한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동네에서 1등하면 전국에서 1등할 수 있는 골목의 부활기에 접어들었다.
1. 투박하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뉴욕 트라이베카는 트렌디한 곳으로 유명하다. ⓒflickr.com Photo by Dan DeLuca
2.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소호 거리는 패션의 메카로 변신 중이다. ⓒflickr.com Photo by John Gillespie
강북 르네상스, 인기 상권이 달라지다
골목의 부활과 함께 인기 상권의 판도도 달라지고 있다. 2010년 이후 가로수길이 트렌디한 명소였다면 최근에는 그 바람이 강남을 지나 강북으로 넘어왔다. 특히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홍대의 상수동은 이미 가로수길이나 방배동 서래마을처럼 ‘레전드’가 됐고, 연남동과 부암동 등이 새로운 골목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강남불패’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나 소위 지불 능력이 있는 나이대의 사람들은 강남의 대로변 상권이나 청담동 안쪽 골목을 최고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강남을 고집하는 사람을 촌스럽게 여기는 시대가 됐고, ‘강북 르네상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지하철 6호선 녹사평역에서 1km 남짓한 거리, 경리단길에서 하얏트 호텔로 올라가는 회나무로 13길에는 작년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장진우 골목’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몫 좋은 자리’도 아닌데, 평일에도 스마트폰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들, 주말이면 좁은 거리가 골목 끝까지 들어가는 사람과 나오는 사람들로 꽉 들어찬다.
이것만이 아니다. 우사단로, 꼼데가르송길, 앤티크 가구거리 등 2~3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새로운 명칭의 골목과 거리가 활개치고 있다.
저렴한 임대료로 시작해 투자비를 낮추는 대신 입지적인 핸디캡을 극복하고자 몇 십 배의 노력과 연구를 거듭한 것이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특이한 것만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화된 상품이나 전략이 없다면 실패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골목의 보편타당한 가치
골목이 뜬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골목의 입지가 높아지면 인근 카페, 레스토랑 등을 통해 탄탄한 골목 상권이 형성되면서 덩달아 주택 가격까지 오른다. 그래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있다. 한 지역이 유명세를 띠고 인기를 얻으면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고, 이에 기존 상인들이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를 낼 수 있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사례는 외국에서도 흔한 일이다. 최근 뉴욕에서 가장 핫한 브룩클린 윌리엄스버그와 예술가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호, 트라이베카 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부동산 가격 변동보다 중요한 것은 스토리두잉(Story-doing) 스페이스이다. 돈 냄새보다는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자 ‘경험 경제(Experience Economy)’ 시대의 체험공간으로서 이야기와 테마가 흐르는 곳, 골목의 다기능적 가치와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부각될 것이다. 상업화돼 가는 작은 골목길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아름답게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시민들과 오가는 사람들의 관심은 물론 지자체의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이제는 청담동 스타벅스나 커피빈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세련된 모습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남들이 모르는 골목 어귀 작고 독특한 까페를 찾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골목길에서 편안함과 은은한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 대형화되고 획일화된 대기업 일변도의 거리 풍경에 현기증을 느낀다면 작고 투박하지만 생명력이 느껴지는 정서적 공간, 골목길로 시선을 옮겨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
3,4. 전형적인 주택가였던 서촌은 최근 갤러리, 디자인 편집숍 등 다양한 개성을 지닌 문화공간이 생겨나면서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안홍범
이향은은 성신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트렌드코리아 2011>부터 <트렌드코리아 2015>까지 트렌드코리아 시리즈의 공저자이다. UX트렌드와 사용자 심리, 디자인 마케팅과 소비 트렌드가 주요 연구 분야이며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와 한국디자인산업연구센터의 선임연구원으로 정부 및 기업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
중이다.
트렌드 촉은 달라지고 있는 소비 패턴과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통해 동시대를 조명하는 칼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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